
편지를 쓴다. 쥰이 윤희에게. 부치지 못할 편지다. 그러나 눈이 그칠 생각이 없던 어느 날, 쥰이 오랫동안 간직했던 마음은 윤희에게 도착한다. 두 사람의 오늘에 아팠던 추억이 스며든다. 어린 시절 쥰과 윤희에게 내렸던 차가운 눈은 마흔이 넘어도 여전히 내리고 있다.
<윤희에게>는 윤희와 쥰에 대한 이야기다. 20여 년 전, 사랑했던 두 사람이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헤어지게 되고 각자 삶을 살다 잠시 만나게 된다. 퀴어 영화의 주된 스토리를 따라가는 듯하지만, <윤희에게>에는 윤희의 딸인 새봄과 쥰의 고모인 마사코가 있다. 영화도 새봄과 마사코로부터 시작된다. 윤희와 쥰의 만남도 두 사람에 의해 성사된다. 긴 시간, 어쩌면 감독이 가졌을 윤희와 쥰에게 보내고 싶던 응원이 새봄과 마사코를 통해 전해지는 듯하다. 편지를 쓴 사람은 쥰이지만 발신자는 마사코인 것처럼, 그리고 수신자는 윤희지만 새봄이 열어보는 것처럼 감독은 관객들도 이 두 사람이 되길 조심스럽게 권한다.
"그래, 우리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윤희에게>는 중년의 여성들, 퀴어들에게 새로운 봄을 선물한다. 처음은 추운 겨울이었지만, 이야기가 흐를수록 코타츠 속에서 즐기는 따스한 계절로 변화한다. 코끝이 시려져도 외롭지 않게 만든다. 앞서서도 말했지만, 새봄과 마사코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엄마인 윤희에게 새로운 봄을 선물한 새봄이는 의외의 인물이다. 사실 새봄이 엄마에게 사랑하지도 않는 아빠랑 결혼해서 왜 나를 낳은 거냐고 소리 지르며 물어도 이상할 게 없다. 내 존재는 도대체 뭐냐며 화를 내도 이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새봄은 묻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엄마에게 짐인 것 같다며 엄마가 이제는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도와줄 뿐이다. 그의 이런 덤덤함이 윤희에게는 용기가 된다. 하지만 역시, 새봄이의 삶도 참 슬프다. 그렇기에 감독은 새봄이에게도 사랑을 주는 걸 잊지 않는다. 윤희가 쥰에게 보내는 편지에 새봄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으로, 그가 딸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새봄도 충분히 그 마음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영화 초반에 나온 잘라진 장갑이 다시 붙여진 것처럼 두 모녀는 이 겨울을 통해 단단해진다. 그렇게 새봄은 대학 생활을, 윤희는 음식점에서 일을 하며 또 다른 시작을 한다. 새봄은 자신이 엄마에게 짐일 거라는 죄책감에서부터 자유로워지고, 윤희는 자신에게 주어진 여분의 삶이 벌이라는 생각에서부터 벗어난다.
이렇듯 <윤희에게>는 단순한 퀴어 영화라고 할 수 없다. 다양한 가족의 형태, 나이와는 상관없는 성장 서사가 내게는 윤희와 쥰의 사랑만큼 진하게 다가왔다. 윤희의 삶과 더불어 새봄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한 이유와 연결된다. 함께 해외여행도 가고 서로 사진도 찍어주며 여느 사이좋은 모녀들처럼 살고 있기를. 그리고 윤희는 종종 마사코의 꿈을 꿔도 눈물을 흘리지 않길 바란다. 편지를 쓰지 않아도 서로 잘 지내고 있다는 걸 이제는 알 테니.
추신, 이번 겨울에도 <윤희에게>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