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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여름이 도망갔다. 더위가 사라지고 하늘은 높아졌다. 기분 좋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지금, 주변 사람들은 다짐하듯 말한다. 사랑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 나도 너도 이 날씨에 속아버리지 말자고, 이 설렘은 가을 때문이라고 되새긴다. 그저 이겨내느라 정신없었던 여름이 지나서일까 마음 한 편의 외로움도 다시 살살 흔들리며 자기주장을 한다. 가을은 올해도 참 쓸쓸한 계절이다. 하지만 애써 무시하고 싶지는 않은 감정인지라 가을이 잔뜩 담긴 영화와 드라마를 들여다보게 된다. 올해도 조 라이트가 연출한 오만과 편견이 이 외로운 계절의 문을 열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이 원작인 <오만과 편견>은 지금까지 다양한 감독들을 거쳐왔다. 우리에게는 콜린 퍼스가 ‘다아시'를 연기했던 BBC 드라마와 오늘 얘기할 조 라이트의 영화가 가장 익숙할 것이다. 두 작품 중 왜 후자를 선택했는지 묻는다면, 그 이유는 조 라이트의 특별함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조 라이트는 난독증 환자다. 그는 ‘오만과 편견’을 소리로 읽었다. 보고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상상하는 것.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조 라이트의 영상이 다른 감독들과 다르다는 점은 안다. 그의 영상에는 아름다운 공백이 있다. 조 라이트의 세상은 빽빽한 글자가 아닌 말과 말 사이의 숨소리로 가득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기에 만들어질 수 있었던, 휘몰아치는 대사보다 이미지를 보여주는 그의 방식을 좋아하는 편이다. 이야기를 전하는 누군가의 작은 숨이 바람이 되고, 광활한 가을 풍경 안에 홀로 서 있는 엘리자베스를 스치는 느낌이랄까. 원작의 서사를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매년 이 쓸쓸한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조 라이트의 <오만과 편견>을 들여다보게 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