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은 인간의 의지대로 조종할 수 없기에 매력적인 소재가 아닐까 싶다. 잊고 싶은 기억들은 야속하게도 자꾸 떠오르고, 너무 소중해서 잊고 싶지 않은 일들은 손에 쥔 모래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사라지는 것 같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사진을 찍고, 영상으로 남기고, 글로 기록한다. 아마 우리 모두에게는 잊지 않으려 자주 되뇌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영화 <애프터 양>은 안드로이드 로봇 ‘양’의 기억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다룬다. 안드로이드 로봇과 복제 인간이 일상화된 가까운 미래. 제이크와 키라 부부는 입양 자녀 ‘미카’의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주기 위해 중국인으로 설정된 안드로이드 로봇 ‘양’을 가족으로 들인다. 어느 날 양이 작동을 멈추고, 수리를 위해 여러 곳을 전전하던 중 제이크는 다른 로봇들과 달리 양에게 기억을 저장하는 특별한 장치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휴머노이드를 연구하는 박사의 도움으로 양의 기억을 들여다보게 된 가족들은 양과 함께했던 저마다의 순간들을 떠올린다. 양과의 이별이 바로 양을 기억하는 또 다른 시작점이라는 사실이 이 영화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지점 아닐까.
장치를 통해 양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장면은 우주를 유영하는 듯 아름답다. 따뜻하고 다정한 양의 기억을 하나씩 꺼내 보다 보면, '장소와 시간에 대한 진짜 기억을 갖고 싶다'던 양의 말이 더욱 애틋하게 다가온다. 기억 장치에 3초씩 저장된 양의 기억을 통해 가족들은 양이 소중하게 생각했던 순간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일상 속 평범한 순간들을 깨닫게 된다. 안드로이드의 기억을 통해 가족에 대한 사랑과 일상의 소중함을 새로운 형태로 조명한다는 점에서 <애프터 양>은 사랑스러운 영화임이 틀림없다.

차와 나비, 그리고 사진에 얽힌 양과의 추억을 회상하는 장면들은 <애프터 양>의 정체성과 같다. 같은 장면에서 조금씩 변형된 대사들이 빠르게 교차 편집되는 장면들은 양의 기억과 가족들 각자의 기억이 조금씩 다름을 의미하는 듯하다. 같은 일이라도, 기억이라는 건 당사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도 하니까.
<애프터 양>은 여타 SF 영화와 달리, 첨단 기술의 화려함을 자랑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기억을 가족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영화에서의 양의 역할이듯, <애프터 양>도 관객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다가간다. 강요하지 않고 그저 영화 본연의 역할에만 충실하여 관객에게 '보여주는' 영화. 그래서 영화가 끝난 뒤에 비로소 관객들이 생각하게 하는 영화. 거기서부터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영화. 이런 영화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자랑하건대, <애프터 양>을 영화관에서 본 것은 올해 내가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를 보는 내내, '평생 이렇게 아름다운 영화만 보면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영상미와 스토리, 음악까지 삼박자가 모두 완벽했던 <애프터 양>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던 그 순간을 올여름 나의 '3초'에 저장할 수 있음이 감사한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