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은 허상인가? 아니면 마음의 안식처인가?
The smiths의 프론트맨인 Morrissey가 쓴 가사다. <노매드랜드>에서 주인공 펀은 이 문구를 몸에 새긴 사람을 만난다. 영화는 Morrissey의 가사처럼 우리에게 묻는다. 집은 허상인가, 아니면 마음의 안식처인가. ‘집’이란 무엇인가.
주인공 펀에게는 집이 있으면서도 없다. 마을을 먹여 살리던 석고 공장이 문을 닫으며, 펀을 포함한 사람들은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엠파이어 지역의 우편번호까지 폐지했다. 사람이 살았고, 집은 여전히 있지만 모든 건 허상이 되어버렸다. 펀은 남편까지 잃고 차에 몸을 실었다. 거주할 곳이 없는 것이지, 집이 없는 건 아닌 그의 삶은 시린 아픔에서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자꾸만 홈리스라고 부른다. 하지만 펀은 홈리스가 아니다. 마음의 안식처는 길 위에 존재했고, 펀은 누구보다도 거대하고 아름다운 집을 가졌다.
펀이 숨을 크게 들이 내쉴 때마다 감정이 밀려올 것이다. 비록 좁디좁은 공간에 앉아 마스크를 쓰고 이 영화를 보고 있음에도 바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알 수 없는 슬픔과 해방감도 함께 따라온다. 내 집도, 내 마음의 안식처도 돌고 돌아 결국 펀과 같길 바라본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절망감이 오기도 한다. 펀이, 결국 감독인 클로이 자오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은 평생 따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속 장소에 간다고 해도 영화를 통해 보는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펀의 마음, 펀의 시선을 통했기에 아름다운 경험을 할 수 있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영화를 보는 동안 하게 될 것이다.

구멍이 난 돌 사이로 펀이 세상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이 장면과 닮은 사람이다. 작디작은 틈도 모두 열어 삶을 사는 사람. 스쳐가는 바람을 느낄 줄 알며, 모든 찰나를 고스란히 담는 사람이다. 그리고 구멍이 나있지만 단단한 돌과 같다. 펀은 그 통로로 자연을, 스치는 인연을, 시간을 만진다. 아무리 돌이라도 언젠가는 닳기 마련이겠지만, 펀이라는 돌은 절대 부서지거나 깎여 나가지 않을 존재처럼 보인다. 영원히 형태가 변하지 않기를 조용히 응원해 본다.
<노매드랜드>는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지만 강요하지는 않는다. 영화를 보면서 펀에게 마음을 맡기기만 해도 우리는 많은 걸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파고드는 자연의 숨을 느끼며 자신만의 안식처가 단단하게 존재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저 이 감각을 잊지 않고 가끔 <노매드랜드>를 들춰보며 나만의 삶을 걸어나가기만 해도 충분하다. 어찌 되었든, 찬란하고 소중한 순간을 살고 있는 우리니까.